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즈먼드 투투 (문단 편집) === 성직자가 되다 === [[1950년]] 투투는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다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극히 얼마 되지 않은 대학과정을 '''[[수료]]'''한 흑인이 되었다. 처음에 그는 [[의사]]가 되고자 했으나 형편이 되지 않았고 결국 교사가 되기로 하였는데 이때 레아 쉔세인 여사를 만나 [[1955년]]에 결혼하게 되는데 맨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공부에 너무 정신이 팔려서 그녀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성공회 사제는 결혼이 허용된다.]. 같은해 투투는 문시빌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의 첫 학생들은 60명 정도였는데 그의 강의는 크게 인기를 끌어 곧 흑인 사회에 전체에 투투는 유능한 교사로 소문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남아공의 유명한 인종차별주의자 [[헨드릭 페르부르트]] 총리의 주도로 남아공 정부는 [[1958년]] 반투 교육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는 흑인들에게 고급 교육을 받는 권리를 사실상 박탈했다. 그해 총리가 된 페르부르트는 이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 '''"반투 아이들에게 실제로는 하나도 써먹을 수 없는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약 현재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백인들과) 동등한 권리 아래에서 그의 일생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교육을 받는다면, 그들은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말도 남겼다. 격분한 투투는 교사직을 때려치고 신학대학인 성 베드로 대학에 입학하여 신부가 된다. 그 와중에 [[1956년]] 남아공 정부는 자유헌장을 발표하여 전국민에게 선거권과 부의 재분배를 요구한 연합 의회 의원 156명을 체포하여 반역죄로 기소했고 이중에는 유명한 [[넬슨 만델라]]도 있었다. 이들은 변호사 베르논 베레제의 열렬한 투쟁으로 [[1961년]] 전원 무죄로 석방되었다. [[1960년]] [[3월 21일]] 새 인종차별 법안에 반대한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백인 경찰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69명이 숨지고 180여 명이 부상당한 샤프빌 학살사건이 터졌다. 투투는 같은 해 신학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1961년에 사제품을 받았으며 1962년 런던의 [[킹스 칼리지 런던]]으로 신학공부를 하게 떠나게 된다. 투투는 [[런던]]에서 경찰관을 만날 때마다 신분증을 미리 준비하며 떨었고 백인들이 자기를 밀치고 [[새치기]]를 할때마다 순순히 물러섰으나 경찰들이 자신을 백인과 똑같이 대우하고 직원들이 새치기한 백인을 줄에서 쫓아내는 것을 보며 매우 크게 놀랐다고 회고했다. 투투는 자신이 얻은 권리가 믿기지 않아 일부러 한밤중에 길거리를 혼자 활보하고 경찰관들에게 일부러 아는 길을 물어보면서 그럼에도 자신이 체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하곤 했다.[* 이미 저 시절에도 영국은 인종차별을 정부 차원에서 막으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관들은 정부의 지시대로 인종차별을 금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영국은 흑백 분리를 주장하며 백인정권을 지속하려는 [[로디지아]]의 행보에 제동을 걸었다.] 또한 런던 하이드 공원의 연설자 코너를 자주 방문하여 영국인들이 거리낌없이 정부를 비판하고 자신의 의견을 쏟아내는 것을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투투는 5년간 영국에서 생활하며 그곳에서도 재치와 유머를 발휘하고 성실함과 훌륭한 인품으로 그곳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1967년]] 그가 남아공으로 귀국할 때 런던 사람들은 성대한 송별 파티를 열어 주었다. 한편 남아공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시궁창으로 치닫고 있었는데, 페르부르트 총리는 ~~틀렸어. 이제 꿈도 없고 희망도 없어.~~ 남아공의 일부 지역에서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을 심히 불쾌해해서 악명높은 고향법을 통과시켰다. 더러운 흑인들이 신성한 백인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의 삶을 위협한다는 것이었는데, 백인종이 흑인들의 위협에 지대한 위기에 처해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고 남아공 전체에 8개의 '고향'을 설정하여 전체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흑인들을 국토의 13%로 밖에 되지 않는 곳으로 강제로 내몰고 흑인들에게 공공장소, 대중교통 등 국토 대부분을 활용할 모든 권리를 박탈했다. 페르부르트가 고향이랍시고 내몬 곳은 흑인들이 생전 가보지도 못했던 곳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반투스탄]] 항목 참조. 흑인들의 처지는 시궁창까지 몰렸고, 남아공 정부는 반투스탄을 외국으로 취급해 흑인들을 "외국 국민"으로 분류하여 [[시민권 박탈|시민권을 박탈하여]] 외국인 노동자 취급을 받게 되었다. 투투가 학교를 다닌 소피아타운이라고 무사할 순 없어 소피아타운의 흑인 6만 명과 허드레스턴 신부는 소피아타운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2,000명의 경찰들이 투입되어 모든 집과 시설을 파괴했고 주민들을 모조리 추방했다. 그리고 그 자리엔 ~~[[정신승리|정신]]~~"[[승리]]"라는 이름의 백인 마을이 들어섰다. 하지만 이렇게 행패를 부리던 페르부르트는 황당한 정책들로 인해 '''같은 백인들에게도 원한을 샀다.'''[* 애초에 남아공의 백인들 중 아파르트헤이트에 찬성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네덜란드계였고, 영국계를 비롯한 타 국가 출신들의 경우 그 정도가 덜했다.] 철저한 엄숙주의 정책으로 동성애 금지는 기본에 나라를 망치는 악마의 바보상자라고 텔레비전을 금지해서 그가 죽고 난 뒤 10년도 더 지나서야 TV 방송국이 생겼을 정도였다. 인종 가릴것 없이 일요일에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야 한다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주요 지지층이던 네덜란드계 아프리칸스인들의 종교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칼뱅주의 개혁교회였는데, 네덜란드 본토 개혁교회와 다르게 근본주의 성향을 고수했다. 이 때문에 개혁교회를 안 다니는 영국계나 독일계를 비롯한 타 백인들은 해당 정책에 의해 피해를 봤고, 당연히 네덜란드계 백인들과 관계가 파탄났다.] 또한 부유층을 위한 노골적인 농업 개혁정책으로 백인 농민들의 원성도 많이 받았으며 [[1960년]]에 백인 농부였던 데이비드 프래트가 총으로 그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계다. 당시 네덜란드계와 영국계의 대립을 보여준다.] 프래트는 페르부르트의 농업 정책 때문에 그에게 원한을 가졌다고 진술했지만 당시 남아공 정부는 당황하면서 프래트(61년에 자살)는 정신이상자라서 같은 백인 수상을 암살기도했다고 어물쩍 공개발표했다. 그러나 결국 페르부르트는 [[1966년]] [[디미트리 차펜다스]]라는 [[그리스]]계 백인[* 사실은 흑인 혈통이 약간 섞여서 컬러드로 분류되었어야 했지만 당시에는 서류상 그를 백인으로 대접해줬다. 그렇지만 페르부르트를 비롯한 진짜배기 아프리카너들은 그를 사적으로 홀대했고 이는 암살 사유 중 하나가 되었다.]에게 칼에 맞아 [[암살]]당했다. 역시 남아공 백인 정부는 차펜다스도 정신이상자라고 발표했지만 세계적으로 뭔 짓하기에 백인 정신이상자들만 죽이려 하냐며 비아냥거렸고 당시 [[이집트]]에선 '''인종차별주의자로서 같은 백인에게 죽어서 행복했을 것'''이라고 비웃었다.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도 역시 백인이 권력을 잡던 [[로디지아]]를 빼고 죄다 그의 죽음을 고소해했다. 투투가 귀국한 시점이 바로 이때였다. 투투는 3개의 학위를 가지고 케이프 주의 앨리스에서 [[그리스어]]와 [[신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투투는 정치적 문제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으나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남아공의 상황은 그를 괴롭혔고 [[1968년]] 포트 헤어 대학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550명의 학생들이 [[잔디]]밭에 점거하고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농성했다. 오후 2시, 경찰이 투입됐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쫓겨났으며 정부에 의해 완전히 낙인이 찍혀 엄청난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이 학대받는 것을 보며 투투는 "내 평생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소"라고 [[1998년]]에 회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